Saturday, August 14, 2010

Don’t let anybody ever take away your dream. If you don’t have that, you don’t have a goal, BY SAMMY LEE
"Sixteen years in sixteen seconds"

luck is when opportunity meets readiness." Maybe we won't all find what we need when we want it, but we can be responsive to what we need when it arrives.



http://www.sunnewsonline.com/webpages/columnists/pressclips/2010/pressclips-12-june-2010.htm

1948·1952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 새미 리

[j Special 8·15 광복절]
1948·1952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 새미 리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난 한국인이다’ 외치며 뛰어내렸죠

미국 캘리포니아주 헌팅턴 비치의 요트 항구와 붙은 아담한 마을. 그곳에는 1948년 런던 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다이빙에서 미국 대표로 참가, 2연패 하며 한국인의 위상을 높였던 ‘살아 있는 다이빙의 전설’ 새미 리의 자택이 있다.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2세다. 1920년생이니 현재 90세. 하지만 활짝 웃을 때의 미소는 소년처럼 맑았다.

그는 최근 미주 한인동포 후원재단이 선정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을 수상했다. 김연아와 함께였다.

첫 이미지부터 그는 운동선수였다. 수영선수들이 즐겨 입는 메이커의 푸른색 트레이닝복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성화봉송 때 입었던 기념 티셔츠를 받쳐입었다.

1978년부터 32년간 살아왔다는 그의 집은 역사적 공간이었다. 두 번의 올림픽 금메달과 1개의 동메달, 그리고 손기정 선수가 선물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모형도 보였다.

동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스포츠 스타와 대통령들과의 기념사진이 벽을 장식했고, 수상 메달과 트로피들이 장식장에 가득했다.

새미 리 박사는 유색인종으로선 최초로 올림픽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딴 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 남가주대학교(USC)에서 이비인후과를 전공한 의사이기도 했다. 헌팅턴 비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LA중앙일보=황주영 기자





● 8월 7일 LA에서 밴쿠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와 함께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을 받았는데.

“수없이 상을 받았고 내 나이가 90살인데도 떨린다. 1953년 설리번 상(미국 내 최고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동양인 최초로 수상) 이후로 반세기 만에 받는 상이라 감회가 남다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이기에 상금도 준다니 아내가 좋아할 것 같다.”(웃음)

● LA 한인타운에 ‘새미 리 광장’이 생기는 것을 알고 있나.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의 손자들은 물론 손자들의 손자까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동포들이 대대손손 나를 기억해 줄 것 같다. 하루빨리 완공되었으면 한다.”

●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자랐다. 이 박사에게 한국이란 어떤 의미인가.

“나의 뿌리이고 긍지이자 자부심이다. 고등학교 때 한 백인 친구가 파티에 초대했다. 아시아인은 나뿐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파티가 시작되지 않아 친구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내 부모님이 파티에 아시아인이 오는 줄 몰랐다’며 그 때문에 파티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나는 아버지 식료품 가게로 달려가 한국인인 게 싫다며 아버지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을 평생 되새기며 살고 있다.”

● 어떤 말씀을 하셨나.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면,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나의 혈통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없다면 앞으로도 나는 계속 무시당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 인종차별이 심했던 1930, 40년대의 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땠나.

“내가 12살 때인가, 1930년대 미국은 일주일에 단 하루, 수요일에만 유색인종이 수영장을 쓸 수 있었다. 그 당시 같이 다이빙 연습을 하던 흑인 친구와 함께 수요일만 기다렸고, 그날은 하루 종일 연습했다. 인종차별이 있었지만 나는 남보다 배로 노력해 LA 인근 버뱅크 고등학교에서 소수계로선 처음으로 학생회장이 됐고 존재감 없는 한국인을 알리기 위해 항상 두 배 세 배 노력했다.”

● 10m 플랫폼이면 충분히 공포심을 느낄 만한 높이다. 다이빙할 때의 기분은 어떤 건가.

“제대로 다이빙하지 못하면 심하게 다칠 수 있다.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젊은 시절 강도 높은 다이빙 훈련을 많이 해 지금도 허리와 등이 안 좋다. 처음 10m 플랫폼에 올라섰을 때는 두려웠지만 ‘나는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나는 코리안이다’라고 외치며 뛰어내렸다.”

● 의학박사 출신이다. 편안한 생활이 보이는데 굳이 힘들게 운동하고 올림픽에 나간 이유는.

“나는 항상 올림픽 챔피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 소원대로 의사가 됐지만 당시 미국에서 ‘한국인’은 여전히 존재감 없는 민족이었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존재감을 금메달을 따서 알리고 싶었다.”

● 어렸을 때 꿈도 올림픽 금메달이었나.

“그런 것 같다. 12살 때부터 기억이 나는데 그때 올림픽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흑인 친구와 함께 다이빙을 하면서 내가 이 방면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을 이뤄 드리기 위해 의대에 먼저 진학해야 했다.”

● 어린 시절은 어땠나?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한 소년이었던 것 같다. 하루는 아버지로부터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이웃 일본 사람 집에 찾아가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싸우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일로 아버지께 엄청 꾸중을 들었다.”(웃음)

● 가장 어렵고 도전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USC 의대에서의 시간들이다. 나의 꿈은 의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의사가 되어 미국 주류사회에서 기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셨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꿈을 이뤄 드리려고 의대에 지원했지만 첫 학기 성적은 F가 여러 개 있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졸업은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다.”

● 6·25전쟁 말기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그때의 기억은.

“영등포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이었다. 내 조국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더욱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 그 이후론 한국을 많이 방문했나.

“평창 겨울올림픽 명예홍보대사로 임명돼 2000년 이후에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정말 한국은 갈 때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전쟁 통에 겪었던 한국의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정말 장한 민족이고 대단한 나라다.”

● 미국에서 운동선수를 하며 인종차별의 벽에 부닥치는 선수들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처음부터 인종의 ‘한계’를 정해 놓는다면 절대 그 벽을 넘을 수 없다. 한국인으로서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도전하면 목표는 이뤄진다.”

● 한국 음식은 좋아하나.


새미 리 박사(가운데)가 지난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5회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시상식에서 상장을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은 미주동포후원재단이 매년 한인사회와 동포들에게 꿈과 열정과 영감을 부여해 귀감이 된 한국인 두 명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오른쪽은 함께 수상한 김연아 선수, 왼쪽은 홍명기 미주동포후원재단 이사장. [뉴시스]

“고추장이 들어간 음식은 다 좋아한다. 음식에 관한 한 가지 징크스가 있었는데 경기에 출전하기 전날엔 반드시 한국 음식이건, 중국 음식이건 ‘아시안 음식’을 먹어야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 젊었을 때 사진을 보니 미남이라 인기가 많았을 것 같다. 부인은 어떻게 만났나.

“나의 어머니는 내가 한국 여자와 결혼하길 바랐다. 아내는 중국계 미국인이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이제 결혼한 지 60년이 되었다.”

● 90년 삶을 되돌아본다면.

“나는 살면서 많은 것을 성취했다. 자식들도 낳았고 손자들도 보고 할아버지가 되었다. ‘할아버지’라는 타이틀은 내가 지금껏 받은 어떠한 수식어보다 값지다.”

● 인생의 모토가 있다면.

“꿈을 좇아가는 삶을 살아라. 절대 꿈을 저버리지 말아라. 당신이 먼저 꿈을 저버리지 않는 한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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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칵테일 >> 한국전엔 군의관으로

이승만 박사와 함께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이순기 선생의 아들이다. 이순기 선생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 온 한국인 이민 1세다. 새미 리 박사는 이순기 선생의 1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인종차별이 심하던 1940년대 미국에서 남가주대학(USC)의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48년 런던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해 남자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동양인으로는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4년 후인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2연패를 하며 세계적인 ‘다이빙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활약하며 다이빙 스타 그레그 루가니스의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이끄는 등 다이빙계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인물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시기에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제임스 설리번 상’(미국 내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아시아계 사람으로는 최초의 수상이었다.



기사 입력시간 : 2010-08-14 오전 12: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