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30, 2009

'조주희'기자

COMPET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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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희'기자 특강 - 동양인, 여자, 편견에 대한 도전이 제 경쟁력을 키웠죠.
2007/11/29 오 전 3:58 COMPETENCY
Profile
1968년 2월 19일 출생 (1984 ~ 1987) 수도여자고등학교(1987 ~ 1988)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1991)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국제정치외교학 학사(1994)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국제정치외교학 석사1988 ~ 1991 미국 CNN International, 어시스턴트 프로듀서(Seoul, KOREA Education) 1993 ~ 1994 미국 CBS News, 프로듀서(Washington D.C)1995 ~ 1997 미국 CNBC Asia, 프로듀서(HONGKONG& SINGAPORE)1997 ~ 1999 미국 CNBC Asia 방송국, 아시아 경제담당 기자(KOREA, HONGKONG & SINGAPORE)1997 ~ 1999 미국 MSNBC.COM, 한국특파원(Seoul, KOREA)1997 ~ 2000 TV Asia 잡지, 국제통신원(KOREA & SINGAPORE)1999(Present)미국 ABC News, 대표(Seoul, KOREA)1999(Present)미국 The Washington Post, 서울특파원 2003(Present)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 강사 2003.10 ~ 2004.3 KBS 2TV 생방송 시사투나잇 공동진행2003년(Present)EBS 미디어 바로보기 공동진행아나운서? 연예인? 조주희 기자님의 참한 외모를 보고 그녀를 아나운서일꺼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은 '기자'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사 ABC뉴스 한국지부 대표로 소개되는 '외신기자'.11월 28일 교내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사실 나는 그녀를 CF에서만 보았을 뿐, 전혀 알지 못했다. 세미나라면 참석할 수 있는 한 여기저기 다 쫓아다니지만, 쌀쌀한 오늘 따라 11월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홍보 포스터를 보고선 보러가고 싶다, '싶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마침 미래의 기자를 꿈꾸는 언니의 부탁(꼭 듣고 알려줘♡)도 있고 해서 어영부영 참석하게 되었다. 그나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여성, 편견에 대한 도전이 제 경쟁력을 키웠어요.'라는 문구. 그리고 그녀의 참한 실물이 무척 궁금했다.조주희 기자님은 흰색 정장바지와 눈에 띄는 밝은 보라색의 정장상의를 입고 나타났다. CF보다는 상단의 사진과 보다 비슷한 용모였는데 이상했던 것은 말하는 분위기에서 40대의 연륜이 묻어나왔다는 것이다. 얼굴은 20대인데. 알고 보니 15살의 아들이 있다고 하니, 프로필을 보고서야 그녀의 나이를 확인했다. 정말 극강 동안이시군. 역시 언론매체 이미지의 힘이랄까, 두 시간 남짓의 강연이었지만 내가 본 그녀는 참하고, 착하고, 얌전한 이미지와는 달랐다. 그것은 그녀의 극강 동안과 'E-' 하고 웃는 미소 때문에 선하게 보이는 선입관일 뿐, 물론 그녀가 선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외신기자답게 보다 '국외' 스러운 분위기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맨들었습니다-" 라고, 표준어를 구사하지 않거나, 그녀는 영어가 때로 더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다며 영어를 자주 섞어쓰기도 했고 여느 강연자 같지 않게 청자를 '전혀'의식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청자를 의식하지 않는다함은, 그녀가 강연에 능숙한 강연자는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명색이 기자로서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마치...그냥 일반적인 '수업'과 같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이 또 나름 신선했다. 그것으로 하여금 오히려 청자에게 화자를 의식하지 않는 편안함을 주었다. 왜 대개는, 강연자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발표하는것에 스스로도 무척 긴장되어 있어 듣는 이도 그 긴장감을 느끼게 되어 발표자의 목소리 떨림이나 실수등에 집중을 하게 될 수 있는데 조주희 기자는 달랐다. 홀에 많은 사람이 모여있음에도 그저 편안히 '수업'을 듣는 것과 더 흡사 했다. 그래도 무대에 올라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하는 것인데, 그녀에게선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연륜인가.카피처럼 동양인, 여자라는 편견을 깨고 그녀가 기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삶의 가치기준, 메세지들을 정리 해 보았다.# 내 자신을 사랑하라. Look at yourself in the mirror. - 제일 첫번째로 할 일은 하루에 거울을 열 번씩 보는 것이다.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내 가치는 스스로가 높인다 Your market yourself. - 나 스스로가 마케터가 되어 나를 팔아야 한다. 욕심을 가지고 나를 발전시키고 홍보해야 한다. 욕심이 없으면 내 발전도 없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다.# 안테나를 높여라. Up to ante! - 관찰력을 높여라. Look around you! - 호기심은 원동력. Be an explore! - 용기는 아름답다. Try! Just do it. 20대. 우리의 나이는 뭔가를 해서 실수나 실패를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다르다. 짤린다. 뭔가를 호기심을 갖고 경험을 해서 나에게 무엇이 맞고 안맞는지 알아내도 록 경험을 많이 해보아야 한다. 스스로를 분석하고 관찰하라.# 사회적 편견과 맞서라. Be a pioneer. - 물론 편견은 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그것을 편견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나만의 목표와 가치관이 있어야 가능하다. Set your goal, abide be your rules. 내가 설정한 준법만큼은 지키면서 내 목표에 나가가야 한다. 거짓말, 편견같은 것이다.- 필요할 때는 뻔뻔해지고 뒤돌아보지 말자. Get it done and don't look back. 한국 사회에선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 있다. 나대면 안되고 사근사근 해야하는 것이다. 조주희 기자는 초등학교 때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가, 이화여대 1년을 다니고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 초등영어 3~4학년의 수준과 한국고등영어가 전부였던 그녀에게 미국 대학교의 수업은 따라가기 힘든 것이었다. 미국은 대부분 6명이나 10명의 학생이 토론식으로 진행하는 수업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많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점수가 나올 수가 없었다. 영어실력도 부족했고, 수줍음도 있던 그녀가 조금 이야기 할때마다 미국친구들이 못알아듣는 얼굴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한마디 하고 나면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것이 반복되니 말하는 것이 싫고 수업을 기피할 정도였다. 학기의 중간정도가 되자, 교수가 불렀다. " 너 토론에서 이야기 하지 않으면 점수를 줄 수 없어." 그녀는 말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자,교수가 조언해 주었다. "남이 듣든 말든 너의 견해를 던지고 생각을 하지마. 말해버리고 잊어버려." 다음 수업에 그녀는 그것을 실행해보았다. 알아듣지 못하면 얼굴을 들이대고 말했다. 그러자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내던져 놓고 생각하지 말기. 잊어버리기. 그것은 또한번 뻔뻔해 질 수 있었다고 한다. - 험담, 시기, 질투, 모함을 즐겨라. Enjoy the battle. 조금만 튀더라도 금방 battle을 걸어온다. 그러나 그냥 즐겨라.- 타협도 전력이다. 'Flexibility'is the key. Nothing's black and white anymore.21세기에는 흑백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이다. 자기 가치관을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게 한다면 타협할 줄 알 수 있다.- 나만의 가치관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무섭게 대응하라. (성차별,인종차별,거짓말) Boundaries are boundaries.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녀는 거짓말을 가장 싫어해서 거짓말을 하는 친구와는 다시 연락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독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했다. 물론 스스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나의 가치관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체로 여성들은, 그리고 나는 외부의 스트레스에 융화와 친화로 대답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스트레스에 회피하는 남성과는 달리 더 친교를 쌓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고 한다. 나역시 어쩔 수 없는 그러한 유형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편이다. 나는 이 '무섭게'라는 말에 자극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대체로 '능글맞게'대응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까. 무섭게 해볼까. #대화의 기술-힘주어 악수하라. Shake it. 자신만만하게 악수하라. 남자와 여자가 크게 다른 것이 바로 이 악수하는 것이다.누군가를 만나고 사회생활을 할때 여자는 악수를 안하는데,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약수도 일종의 communication이다. 나의 위치와 서로의 관계를 알려주는 표현방식인것이다.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라. 손을 기다리고 있는데 외면할 사람은 없다.- 허리를 펴라. Sit confident.이것또한 하나의 표현이다. 바디랭귀지는 앞서 말했듯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연습해야한다.사람들마다 인사+악수를 동시에 하려는 나머니 허리를 굽씬거리면서 악수르 하는 사람도 있는데, 허리를 곧게 펴고 손을 내미는 동작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연습하는 것이 좋다. 나는 아닐 거 같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런 악수를 한다.- 목소리. 집에서 "안녕하세요"를 연습하는 것도 좋다. 조주희 기자는 원래 목소리가 작아서 고민이었다고 한다. 뉴스영어는 톤이 더 낮기 때고 복식호흡에 의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러한 목소리를 내는 것에 노력을 많이 하였다. 힘있고 정확한 목소리역시 중요하다.-귀를 열어라. Be a good listener.더 말할 것 없이 중요한 말이다. 인터뷰시, 상대가 하는 말을 듣다가 뒤에 이어 할 질문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좋지 않은 태도다. 무엇보다 상대의 말을 잘 듣고 관찰, 분석해야한다. 평소에 친구들과 쉽게 연습할 수 있는 경우다.- 눈으로 표현하기. Keep eye contact.눈을 보면서 이야기 하면 좋겠다.-척 하지 마라. Don't be afraid to reask and reconfirm.내가 모르는 것을 대화 나누던 중에 몰랐다면 그 모든 대화는 그냥 허비한 것에 불과하다.다시 한번 모르는 것은 적극적으로 물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례가 되는 경우는 제외하고.질문을 피하면 평생 소극적인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발음과 발성에 신경쓰라. Get your message through.상대방이 내 얘기를 못 알아듣고 지루해 하는 것은 내 책임이다. 녹음기로 녹음해 들어보면 내 목소리에 이상한 특징이 보일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 톤이 과학적으로도 듣기에 편안하다고 한다. 복부로 소리내어 낮은 톤으로 말하는 것을 연습하자.- 마지막에는 항상 상대편에게 기회를 주라. give the others chance..전화를 끊을 때에도, "더 할말 없어?" 라고 마지막에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면 당신은 관용적인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준비된 도약- 전략가가 되어라. A true strategies has options. 하나의 목표만 파고 그것에 관련된 것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가령 기자가 되고 싶다고 해도 광고도 해보고, 번역도 해보고, 여러가지를 해서 나중에 선택할 때 옵션이 많을 수 있도록 하자.-언어는 기본. Global readiness. 영어는 기본이다. 영어가 안되면 제2외국어라도. 10년 후 중국어가 더 많이 쓰이게 될 수 있다. 안하고 산다고 할 수 없다. 세미나 정도는 알아들을 정도로 마스터해두는 것이 좋다. 물론 기자를 선발할때 가장 기본이 되는것은 bilangual 이다.-시사 감각을 기르자. know what's going on. 여러분 신문 잘 안보세요? 연세대에서 신방과를 가르치고 있는데, 신방과 애들도 신문잘 안본다고 한다. 아침에 나눠주는 포털신문 읽고 신문읽는다고 하면 곤란하다. 인터넷 신문도 지양한다. 차라리 좋아하는 신문사의 사이트에 가서 읽는 것이 낫다. 헤드라인 정도라도 읽어두자. 신문을 읽고 시사감각을 기르는 것은 곧 나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positioning할 수 있는것이다. positioning. 이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고등학생은 논술준비한다고 신문 열심히 읽지만 대학생은 신문 정말 읽을 일이 없다. 학교생활, 학과공부하고 취미생활 하는데 바쁘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살다보면 신문없이도 살아진다. 더욱이 세상이 평온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도 1학년때는 뉴스를 보지 않고 살았다. 몰라도 살만했다.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기사를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따로 sosiety카테고리를 만들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시사는 즉 현실이라는 것이다. 정치,경제, 그것은 누군가 따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에 들어가 머리깎고 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현실과 분리되어 살 수 있는가? 나는 질문을 던졌다. 시사를 외면하는 것은 현실을 부유하는 일본 소설속에 빠져 사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적극적 도전,용기를 갖자.Jump out of your closet. 우리는 활동범위가 한계가 있다. 조주희기자의 아들은 지금 15살이고 이혼했다. 이혼했다는 것을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목소리는 거침없었다.(clear했다.)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시절, 사회에 반항하고 말썽을 많이 부려서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오시는 일이 많았다. 돌아가신 이유가 꼭 자기 탓인것 같아 효도하려고 일찍 결혼했다. 그러나 조혼, 게다가 중매결혼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이 인생에서 한 일중에 가장 의미있었던 일은 이혼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흔해졌지만 93년도 시절, 이혼은 수치였다. 이혼한지 10년이 지나도 친척끼리 모르는 일도 있었다. 그 만큼 이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때, 그녀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을 감행했다. 아버지는 서울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이혼하고, 아들을 데리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녔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22~24 이었다고 하니 딱 우리 나이 대. 상상도 할 수 없다. 수업시간이 되면 공강인 친구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수업을 들으러가고, 시험기간이 되면 옆집 친한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몇일간 맡겨두고 벼락치기를 했다. 그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조주희는 없었을 거라 말한다. 내가 만든 테두리가 아니라면 한번쯤 의심해보고 그 테두리를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선택의 확률을 높여라(인턴쉽 활용) Probability management대학 1학년때부터 인턴쉽을 했다. 1학년때 외무위원장 사무실에서 번역을 했다. 그 다음으로 cnn통역하는 일도 했다. 자신에게 맞는 일, 맞지 않는 일의 터득은 probability를 높일 수 있다. #기자의 자질.ㅇ Open-minded 진정한 자유인의 자세 (편견이 있으면 안된다)ㅇ Curiosity 호기심ㅇ Balanced view 균형된 시각ㅇ Accuracy 정확성ㅇ Inter-Cultural prespective 국제적 감각 사회에서 일어나는 신념을 이해하고 파고들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들이 기자로서 일을 할 때 보람을 느낄 것이다.#Q&AQ기자가 되려는 꿈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나?-중고등학교때 꿈은 대통령이었다. 사회가 하도 이상해서, 자신이 올바른 나라를 만들리라 대통령을 마음먹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대통령이 되려면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앵커를 해서 정치권에 출마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아나운서가 되려고 그 쪽일을 하다보니 기자가 적성에 맞았고, 지금도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다.Q유학과, 외신기자를 하려면 영어를 잘해야할텐데, 영어공부는 어떻게 하였나?-영어는 정말 힘들다. 무조건 외웠다. 같은 단어를 연습장 2장으로 깨알같이 빽빽하게 써서 외웠다. 쓰고 자면, 아침에 저절로 써진다. 언어는 그냥 외우는 것 같다. 원서도 읽었다. (영어공부를 너무 간단하게 설명한 나머지 허탈했다. 그냥 외우라니..맞는말이면서도.)Q 궂이 외신기자를 선택한 이유는?-한국과 미국을 왔다갔다 하며 살면서 양국에서 적응해나가는 가운데 스스로의 캐릭터가 형성된 것 같다. 자신은 한국회사에 잘 맞지 않았다. 아부할 줄 모르고, 누가 뭐라고 혼내면 소극적이 되어서 상처를 곧 잘 받으니 살아남기 힘들었다. 시사투나잇의 제의가 들어왔을 때, 영어로만 기사를 쓰다가 한국말로 해보니 재미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 미국에서 하던대로 스크립트와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한 질문을 던졌더니, 사람들이 당황했다. 자신은 앵무새가 아니므로 주어진 대본을 그냥 읽을 수도 없었는데, 방송사가 원한 것은 그저 '외신기자'라는 타이틀이었다. 한국의 방송사는 정해진 format이 있다. 선배부터 후배까지 모두 그것이 똑같다. 미국 같은 경우는 스스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을 이해해준다. 그래서 여러가지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상하개념이 없는데, 사장님에게 메일을 보낼 때도 David,라고 이름을 불러서 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혼 후 한국에 올 수 없었다. 시작해서 소개를 받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Q. 경영학과 2학년의 재학중인 학생인데, 나이가 또래보다 많아 고민이 많다. 늦게 사회에 나가거나, 일찍 사회에 나가는 것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이화여대에서 1학년을 다녔는데, 87년도가 한창 대모하던 시기라 한 학점도 따지 못하고 미국으로 갔다. credit을 따놓은것이 없으니 대학을 1학년 때 부터 시작했다. 자신역시 나보다 어린아이들하고 같이 공부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이라는 것은 내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를 먼저 묻고, 나이로 서열을 정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자로서 인터뷰를 하면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높으신분들을 대할때도 있다. 나는 입사 1년차 기자고 상대는 외무부장관이기 때문에 내가 낮은 위치다, 라고 낮춰 들어가면 상대도 나를 낮춰보게 마련이다. 물론 두손으로 맞잡아 악수를 하는 기본적인 예의는 필요하지만 기자로서 동등한 입장이므로 꿀릴 이유가 없다. 당당하게 상대를 대하라. 처음엔 어라, 만만찮네, 하고 놀라겠지만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 줄 것이다. 그녀는 여자 후배들이 더 좋다고 했다. 어디가서든 여자들을 더 독려하게 된다고 했다. "누나 좋아요~"라는 남학생보다는 여학생이 더 반갑다고 했다. 여학교이기도 하고 자꾸 여자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렇다고 레즈비언은 아니라며 농담을 하였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섹슈얼한 것이 아니라 '동경과 보호'의 관계인데 이의 경우 '인정한다' 라는 뜻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그 냉혹한 여자 세계에서 인정받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쁘지 않겠는가. 이것은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더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녀는 매우 당찬 여성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주하기자도 그렇고, 이번엔 기자라는 직업에 매료될 것 같다. 자신의 일에 회의를 가진적은 없었냐는 질문에 미안하지만 한번도 없었다, 라고 말하는 그 기자라는 직업은 무엇이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또 선망하는가. 자신의 일을 즐겁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아니, 나는 부러워할 때가 아니지. 나는 벌써 3학년에 올라가고 있다. 본격적으로 졸업과 취업의 압박이 코앞에 다가왔다. 나에게는 무엇을 해놓았느냐보다 뭘 할것이냐를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 더 시급하고 답답하다. 1학년때는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루트를 구성해 놓았다. 지금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할 때임을 느낀다. 그나마 불안한 이 시기에 위안이 되는 것은 아직 시도중이라는 것이다. 또 그것이 손해가 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사실, 그래서 이 시절이 끝나간다는 것이 아쉽다.

Tuesday, April 21, 2009

Remarks as delivered by Dr. Jim Yong Kim, March 2, 2009

Remarks as delivered by Dr. Jim Yong Kim, March 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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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load and listen to Dr. Kim's speech (11.8mb, MP3)

Thank you, Ed and Al, for your too generous introduction – and for the honor that you and your colleagues on the board of trustees have bestowed on me, in entrusting to me leadership of this magnificent institution—this college on the hill. And thank you, everyone, for the warmth you’ve already shown me as the newest member of the Dartmouth family.
On a personal note, I'd like to thank my parents. My father, Nhak Hee Kim who passed away more than twenty years ago, was a dentist - and dentists are among the most practical people on earth. He taught me the value of hard work, determination, and keeping both feet firmly on the ground. My mother, Oaksook Kim, studied theology and received her Ph.D. in philosophy. She taught me to respect every individual-while daring great things. Dare great things, keep both your feet on the ground. I hope that will prove to be a good formula for a president of Dartmouth.
As I embark on this exciting journey, I'm humbled by the example set by those who've gone before me - men like Ernest Hopkins, John Kemeny and John Sloan Dickey, about whom I will speak in a moment. And men like David McLaughlin and James Freedman - and of course Jim Wright.
Jim, you've devoted your life to Dartmouth, including 11 years as President. You leave enormous shoes to fill. Your tenure has enriched academic life at Dartmouth with an expansion of the faculty and the launch of new academic initiatives, and it's transformed the campus with an array of beautiful buildings. You and Susan created a warm and inviting atmosphere for all Dartmouth students, faculty and alums - and even for newcomers like me. My wife Younsook and I will do our best to continue to nurture this wonderful environment.
Younsook is sorry she can't be here today. As Ed mentioned, my second son was born just three days ago. It's been quite a week! My older son Thomas said to me just yesterday, "Daddy, why does everything have to happen to us at the same time?" But I can assure you that Thomas and Younsook are just as excited as I am in joining the Dartmouth community.
As I drove onto our snow covered campus today, I was struck once again by the spectacular setting in which Dartmouth students live and learn. I can’t imagine a more beautiful place to be a student – or, for that matter, a College President.
But far beyond its physical beauty, Dartmouth is an institution without parallel - unique, even - in higher education. This is a community bound by rich traditions and a vibrant, ever-evolving culture. The diversity here is real yet there's a strong, abiding sense of family that extends out to our 69,000 alumni. As an anthropologist, I understand and value the importance of cherished traditions, a deeply shared campus culture and a diverse, yet cohesive community. My family and I are anxious to learn about and embrace every bit of it.
Indeed, I'm looking forward to working with all of you in the years to come to preserve and strengthen what makes Dartmouth so special . . . to ensure that our College is appreciated and its influence felt ever more widely in the world . . . and to secure its future in a rapidly changing global landscape. These will be my top priorities as President and Chief Advocacy Officer of Dartmouth College.
Young people from many, many backgrounds come here because of the exceptional learning experience that Dartmouth offers – whether as undergraduates or to join the first-rate professional schools and graduate programs that the College can point to with great p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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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rtainly, a vital part of that learning takes place in the classrooms in Kemeny, in Dartmouth Hall, the labs in Fairchild and among the stacks in Baker. But just as important to that learning is what happens out on Whitey Burnham Field, up on Mount Moosilauke, here on the stage in the Hop and, yes, even late at night on Webster Avenue. Education is not just about transferring knowledge - it is about learning how to be citizens of the world, how to work effectively with others as part of a team, and how to emerge from your studies with an enduring and robust philosophy of life.
Dartmouth is better equipped, perhaps more so than any other school in the nation, to teach these virtues . . . to help educate well-rounded leaders who can go forth and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That brings me back to John Sloan Dickey, whose example and achievements were such an inspiration to me during the course of my selection as President of Dartmouth.
President Dickey left a lasting mark. He spent most of his career before becoming President outside of academia, but he believed passionately in the power of education to foster positive change. He was fond of telling students “the world’s troubles are your troubles.” And he believed that a Dartmouth education should equip young people to do something about those troubles. I believe that remains Dartmouth’s most important mission today.
Like President Dickey, I've spent much of my career in places that are very different from Hanover. I've spent plenty of time in the classroom, but also in the slums of Peru, amid the rural poverty of Haiti, in post-genocidal Rwanda, and in the snowy cold of Siberia.
In my small way, I've tried to make the world's troubles my troubles. I've tackled them directly by setting up treatment programs, working to lower the prices of life-saving drugs and changing global health policy. But I've always known that my own impact as an individual will be limited. That's why I've worked to teach and mentor young people who can have a far greater impact than me. That's what attracted me to this extraordinary place called Dartmouth College. Here, we have all the tools to prepare an army of future leaders: students like you who will go out into the world and, by making the most of what you learn from your professors and from each other, make that world more productive, more enlightened, more humane and more just.
We know we can create these leaders because Dartmouth faculty do what is thought to be impossible at other institutions - you teach so well that students give the quality of your instruction a 97 percent approval rating. At the same time, you do ground-breaking research and make great contributions to your field. It will be my job to ensure that you, the faculty, reach your highest aspirations, both as teachers and as scholars.
We know Dartmouth graduates can change the world . . . they already are. From the last two Secretaries of the Treasury, Henry Paulson and Timothy Geithner, to the Ochieng' brothers, Milton and Fred. Inspired by a Dartmouth community service trip to Nicaragua, the Ochieng's returned to the small village in rural Kenya where they were born to start a clinic. This clinic administers not just medical care but hope itself. Dartmouth graduates all over the world are doing great things, and making us all proud.
I've found again and again in my career that when you set bold, ambitious goals, plenty of people will tell you that you're crazy or that it just can't be done. That's what they told us at Partners In Health, when we wanted to treat people suffering from multi-drug-resistant tuberculosis in the slums of Lima, Peru. And it's what they told us at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en we wanted to treat three million people living with HIV in developing countries.
I'm happy to say that we didn't listen to the naysayers. Now, people across the globe are being treated for both drug-resistant tuberculosis and HIV, and the naysayers have been converted.
If we teach nothing else at Dartmouth, we must teach our students to find their passion, to aim high, work hard, and settle for nothing less than to transform the world. I know Dartmouth students can achieve anything to which they commit themselves.
My job will be to make sure that Dartmouth gives you, our students, all the tools you need to do unprecedented things – whether in science or the arts or business or health – things that even today seem unimaginable. Who could ask for a better job than that?
The anthropologist Margaret Mead once said, “Never underestimate the capacity of a small group of committed souls to change the world, indeed, it’s the only thing that ever has.” Well, we’re not such a small group at Dartmouth and I’ve already met a lot of committed souls here. The greatest privilege of my life will be to work with all of you as President, to make the world’s troubles our troubles, and to train leaders the likes of which the world has never seen, to take them on.
Thank you all for welcoming me. I can't wait to get started. It is, as we all know, a small college. And yet the Kim family already loves it. Thank you very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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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Following your dreams is one thing, but you’re going to be much better at following your dreams if you have some skill."
http://www.roadtripnation.com/explore/interview.php?interview_id=262#

[월드 리포트]아시아계 최초 ‘아이비 리그’ 총장 오른 김용 교수 인간 탐구
봉사·헌신의 삶… 美 주류사회서 ‘우뚝’‘제2의 김용 키우기’ 새로운 도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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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7003259 [월드 리포트]아시아계 최초 ‘아이비 리그’ 총장 오른 김용 교수 인간 탐구
봉사·헌신의 삶… 美 주류사회서 ‘우뚝’‘제2의 김용 키우기’ 새로운 도전 시작 -->
아시아계 최초의 ‘아이비 리그’(미 동부 명문 사립대) 총장. 제17대 미 다트머스 대학 총장에 내정된 김용(미국명 Jim Yong Kim) 하버드대 의대 교수의 이름 앞에는 당분간 이 수식어가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김용 박사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으로 점철된 삶이 밑거름이 됐다. 오는 7월1일 다트머스대 총장에 공식 취임하는 그는 현재 지난달 얻은 늦둥이 둘째 아들을 위해 ‘육아 휴가’를 내고 새로운 인생 설계를 짜고 있다.
■철학도를 꿈꾼 개혁파그는 어려서부터 사회 의식이 뚜렷한 개혁 성향의 행동파였다. 13살 때인 1972년,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와 조지 맥거번 민주당 후보가 맞붙었던 미 대선 당시 아이오와 맥거번 선거 캠프에서 선거 운동을 도왔다. 아이오와주 머스커틴 고등학교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미식축구팀 쿼터백을 맡으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미 브라운대에 입학한 그는 정치학이나 철학을 전공하고 싶어했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아이오와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딴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퇴계 이황과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시며 큰 뜻을 품고 세계를 위해 봉사하라고 가르치셨다”고 회고했다. 김용 박사가 의사의 길로 선택지를 바꾼 과정엔 아버지가 있었다.“브라운대 재학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일입니다. 아버지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할 작정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대답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차를 길 옆에 세우더니 ‘네가 전문의 실습을 마친 다음에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든 좋다. 하지만 너는 소수 인종이다. 기술(skill)이 필요하다. 기술을 먼저 익힌 뒤 다른 것들을 추구하도록 해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처지에선 아버지가 옳았습니다. 꿈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약간의 기술을 지닌다면 그 일은 더욱 나아질 것입니다.”(‘로드 트립 네이션’ 회원들과의 인터뷰)
◇김용 박사가 WHO 에이즈 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아프리카 우간다를 방문, 현지 주민들에게 에이즈 예방 및 치료 활동을 벌이고 있다. ‘파트너 인 헬스’ 웹사이트■전환점이 된 아이티 봉사1982년 하버드 의대에 입학한 의대생 김용은 흑인 출신 대통령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정체성 문제로 고민했다. 동시에 의사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부단히 모색했다.김 박사는 그때 특별한 두 사람을 만났다. 그의 박사 논문 과정을 지도한 하버드대 아서 클레이만 교수(의료 인류학)와 1987년 의료봉사 단체인 ‘파트너 인 헬스’(PIH)를 함께 결성한 하버드 동료 폴 파머가 그들이다. 클레이만 박사는 지난달 김용의 다트머스 총장 지명 소식을 듣고 “그는 대학 총장의 새로운 전범이 될 것”이라면서 기뻐했다. “브라운 대학과 하버드 의대 시절은 인생의 목표를 확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사회 정의를 위한 일에 헌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한국에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보다 더 나의 도움이 절실한 나라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하버드대 교지 인터뷰) 클레이만 교수는 평소 의료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은 김용을 최빈국 아이티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던 파머에게 소개했다. 80년대 중반 김용의 아이티 방문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참혹한 가난과 그에 수반되는 질병, 영양실조….“아이티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때 나는 아이티와 같은 빈국의 참혹한 상황을 개선하는 일이야말로 나에게 맡겨진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버드대 교지) 그 이후 김용은 아이티와 페루 등지를 돌며 가난한 이들의 질병 치료에 헌신했다. 이 기간에 김용은 가난과 붙어다니는 질병인 결핵 퇴치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이종욱 박사와의 만남김용과 고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인연은 결핵을 통해 맺어졌다. 페루에서 결핵 퇴치 자원봉사 활동에 나섰던 이 전 총장의 부인은 젊은 의학도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이 전 총장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 인연으로 김용은 2003년 1월 WHO 사무총장에 취임한 이종욱 박사의 총장 자문관으로 발탁됐다. 이듬해 김용에게 맡겨진 WHO 에이즈 국장직은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지금은 벤치마킹 대상이 된 ‘3×5 운동’(2005년까지 300만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운동)은 ‘행동파’ 김용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획기적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이 운동을 시작했을 때 WHO 내부에서조차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나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러 면에서 행동주의자입니다. 그런 행동주의자가 WHO라는 도구를 손에 넣었을 때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는 이론을 변화시키고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자고 말했습니다.”당초 목표보다 2년 정도 지체되긴 했지만 ‘3×5 운동’은 끝내 목표를 달성했다.“에이즈가 만연한 레소토의 보건장관이 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처음 3×5 운동을 선언했을 때,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냈습니다.”(하버드대 교지)다트머스대 총장 추천위는 “김 박사는 교실 안과 밖에서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는 다트머스의 이념인 배움과 창의, 봉사를 실현한 인물”이라면서 총장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세계의 문제는 젊은이들의 문제”대학 학장 등의 경력이 없는 김 박사가 총장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 박사는 총장 지명 직후 “아시아계 대학 고위직 인사가 희소한 가운데 대학 경영 경험이 없는 나를 총장에 지명한 것은 수많은 첫 번째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다트머스대가 나의 다른 활동들을 평가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의 부모들에게는 “이제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이나 빈국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키워야 한다”고 당부했다.김 박사는 여러 면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닮았다. 미국 내 소수 인종 출신으로 젊은 시절 정체성 고민을 극복하고 소외 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통해 미국 주류 사회의 인정을 받은 인생 역정이 그렇다. 김 박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미국에 사는 소수 인종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오바마 정부는 김 박사에게 에이즈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박사는 총장직 수락과 관련, “지금까지는 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했지만 한 사람이 하는 일엔 한계가 있다”면서 “차세대를 교육시켜서 그들이 더 큰 일을 하도록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5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던 저개발국 출신의 소년에서 미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한 김용 박사. 그가 제2, 제3의 김용을 키워내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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